그리고 나서 저는 아직까지 실험실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몇 년간 제가 기록했던 실험노트며 자료들은 먼지를 뿌옇게 덮어쓴 채 방구석에 쌓여있습니다. 가끔 해묵은 자료정리들을 하다 보면 연구자로서의 제 보잘 것 없는 기록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Reverse transcriptase 저해제를 찾는 것이 저에게 맡겨진 첫 연구주제였습니다. Reverse transcriptase(역전사효소)는 RNA 바이러스인 HIV(AIDS의 원인 바이러스)가 DNA를 합성하여 유전정보를 전달하는데 필수적인 효소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저해하는 물질을 찾으면 AIDS 치료제로 개발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지요.

제가 AIDS에 대해서 처음 들었던 것이 1982년이었습니다.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교수가 미국 의약학계에서 당시 가장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질병이 AIDS라고 했습니다. 그 후 1985년부터 우리나라에 AIDS 감염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은 1989년에 저는 AIDS 치료제 개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신물질을 찾는 꿈도 꾸면서 실험에 몰두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당장 더 급하게 연구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AIDS 치료제 연구는 그럴만한 조건이 되는 나라에서 감당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른바 경쟁이란 것이 세계화, 지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사뭇 철없는 생각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몇 년 후에 대통령 김영삼씨가 멀리 미국까지 가서 핵융합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고 과감하게 선언했을 때 저는 그 사람이 철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후 40여년 동안 미국이 수십조 달러를 퍼부었어도 상용화 가능성은 여전히 미지수였던 1995년에, 정부 연구개발예산이 아직 수조원 수준에 머물러 있던 대한민국이 핵융합연구에 10년간 2천여억원을 쏟아붓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그건 기정사실화되어 그 해 가을 정기국회를 통과해 버렸습니다. 과학기술의 기초가 튼튼하게 다져진 가운데 신명을 다바친 연구활동의 결과로서 노벨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벨상 받는 것을 국가의 목표로 내걸던 시기였습니다.

현대과학기술의 가장 큰 특징은 거대과학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IT, BT, NT, CT 등으로 일컬어지는 첨단 연구분야로만 집중하여, 정부가 앞장서서 막대한 연구개발자금을 투입하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대형 연구과제로 묶여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국제경쟁력이고 산업경쟁력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모든 인류에게 고른 혜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국가, 특정한 자본의 이익으로 귀속되고 있습니다. 일류기술과 일등 인간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도태되어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여기 이 땅에서 지금 이 순간에 절실한 과학기술의 문제는 도외시되기 십상입니다. 이를테면, 국내에서는 아직 1천명을 넘지 못한 AIDS 치료제 연구가 (다국적 제약회사의 이윤보장을 위한 약가 문제나 강제실시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하고) 매년 새로 발생하는 3만여 명의 결핵환자를 위한 연구나 시설투자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은 그러한 논리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과학상점은 거대과학의 틈바구니에서 발생하는 우리 지역의 과학기술 문제, 사회적 약자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과학기술의 고민들을 일반 시민과 과학기술자가 만나서 같이 풀어보자고 시작한 운동입니다. 과학상점운동이 대전지역에 소개된 지 10여년, 그리고 서울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실천적인 논의를 전개한 지도 10년, 지금 한국의 과학상점운동은 사회적 약자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연구를 표방하는 시민참여연구센터(참터)라는 이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출범한 지 3년 남짓 되었지만, 그 동안 참터는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치면서 소중한 경험들을 쌓아 왔고, 지역에서의 과학상점운동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고도 험합니다. 답보상태에 놓여있는 회원들을 늘이는 것, 다양한 전문가들을 참여연구자로 확보하는 것, 의뢰된 과제에 대해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 지역 사회와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것, 그 밖의 많은 일들이 당면한 과제로 놓여있습니다. 회원들께서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도와주십시오. 현장의 과학기술자로서 저의 옛 이야기 속 작은 문제의식을 가졌던 분들, 지역사회의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고자 하는 분들, 과학기술의 문제는 일반 시민의 참여로 더 올바른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분들, 저희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아직은 참터 하나밖에 없는 한국의 과학상점이 우리의 바람대로 머지않아 전국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한번 해 봅시다.

2007년 5월, 운영위원장 이성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