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을 떠올리며 입으로 몇 번 반복하면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말들이 있다. 이를테면 '나의 성장'이라든가,'바다건너' 같은 것 말이다. 내겐 그런 것 중 하나가 더 있었다. '파리에서.' 말하자면 스스로, 혹은 책이나 글을 통해서 만든 환상을 즐기는 것인데, 나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일년하고도 육개월 간의 파리체류는 그 환상을 현실 좌표에 옮겨 그 경계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나의 환상 즐기기 취미에서 '파리에서.' 를 제외하게 되었지만, 현실로 만든 추억은 내게 또다른 흥미있는 자료로 존재한다. 그 추억의 일부를 지면으로나마 공유하려고 한다.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코즈모폴리탄이 된 듯한 세련된 느낌에 취한 건 잠시, 내 둘레에 쳐진 엄청난 높이의 장벽에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다. '프랑스 인들은 영어를 쓰는 걸 싫어한다.'는 여행책자의 별로 무시무시하지도 않은 경고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관광객을 주로 상대하는 호텔이나 내가 실험할 연구실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 문을 열고 나서기만 하면 꼭 3미터 거인들에 둘러싸여 숨조차 쉬지 못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태반이었다. 내가 준비한 불어는 '질문하기' 뿐이었지, 그들의 그 빠르고 툭툭내뱉는 듯한 불어를 이해하는 것은 생각지 못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Ou sont les toilettes? (화장실이 어딘가요?)' 하고 물으면 그 세 배는 족히 됨직한 길이의 대답으로 압도해버리기에 차라리 혼자서 샅샅이 뒤져 화장실을 찾는게 훨씬 더 빠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는 투봉법이라는 자국어 보호를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매년 개정하여 내 놓는 사전은 그 종류부터 각각의 질까지 매우 광범위하고 집요하다. 간판, 안내문 어디에서도 불어를 찾을 수 있으며 오히려 한국의 각 표지판들마다 적힌 영어안내와 같은 친절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한국에서 오는 관광객의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그렇지, 자기 말은 자기가 지키는 거지', '영어가 없어서야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가는 관광도시가 되겠어?', '한국말이 있으면 좋겠는데' 등. 사실 내가 느낀 파리의 영어부족(?)현상은 꼭 그들의 자문화인 프랑스어 보호를 위해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의 말 그대로 '광풍'이라고 부를 만한 영어에 대한 집착은 없지만, 영어가 지금 세계에서 쓰이는 암묵적인 공용어라는 것은 인정하고, 또 그 대열에 들기 위한 노력 역시 계속하고 있다. 실제로 공교육과정에서의 영어 수업이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이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으며 그래서 지금 프랑스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영어를 잘 가르치려 노력한다. 또한 대학에서의 영어수업도 늘려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 역시 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하철에는 어김없이 '월스트리트 영어를 배우세요', '영어가 안된다고요? 여기로 오세요' 와 같은 사설 영어교습 광고도 붙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같은 표면적인 영어 열풍, 영어를 못하면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상황 등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는 공교육과정에서의 개인 간 경쟁이 한국만큼 치열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등학교의 등급은 대학의 등급을 결정하고, 대학의 등급은 직업의 등급을 결정한다. 그리고 직업의 등급은 곧 경제적 등급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단순히 자산의 차이 뿐만 아니라 권력, 명예, 가능성, 희망과 같은 추상적인 자산까지 결정해버린다. 그것이 아주 거대한 경쟁의 장에서 매번 치열하게 반복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최상위 엘리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균일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으며 전문화된 직업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꼭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덤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영어 뿐만 아니라 각종 사교육 시장이 번성할 틈새가 별로 없다. 관광객에게 영어로 안내 한 번 못하는 게 우리 인생에서 별 대수인가. 그걸 위해 영어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는 걸 잘 아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문화 다양성을 들 수 있다. 보통의 프랑스인들에게 '언어공부'라는 것은 취미의 한 종류이다. 실제로 서점에 가면 영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에 대한 입문서들이 굉장히 많다.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서점의 언어 코너에서 할당한 크기를 비교해본 결과 영어, 일어, 중어는 프랑스의 서점보다 크고, 그 외의 언어는 전멸이라고 해도 좋을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씩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중국어로 인사를 건네오는 프랑스인을 만난다. 취미로 중국어를 공부했다면서 중국인이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어떤 경우 인접국인 한국의 언어도 인사말 정도를 배워서는 '안녕하세요' 하며 더듬더듬 인사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 학교에서 한국드라마에 빠져 한국어를 공부하겠다는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프랑스어를 배운 경험이 있다. 이처럼 타언어에 대해 매우 자유로운 인식을 가지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취미의 일종으로 언어배우기를 선택하는 것은 그들 사회와 개인에게 존재하는 문화 다양성에 대한 건전한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곳에도 '불어가 아니면 안돼!' 라거나 '영어를 모른다니 무식한 놈들!' 과 같은 인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그 비율 상 한국과는 아주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국에서 한국어의 지위는 어떤 것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쪽으로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영어점수에 집착하고, 또 다른쪽에서는 한국어 순화에 대해 강박적이다. 고종석은 <감염된 언어>에서 '순화'의 충동은 '죽임'의 충동이라 지적한다.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풍부한 문화를 누리려는 노력은 흔히 말하는 '고급대중문화'에만 있을 뿐 우리 주변에 있지 않다. 나는 파리에서 먹었던 중동지역 음식을 한국에서 같은 가격에 먹을 수 있을까? 이탈리아어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책을 쉽게 구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중동지역 음식을 찾으러 서울의 거리를 헤매고 이탈리아어를 공부해도 나의 삶의 질은 좋아질 수 없다. 그 동안 내가 가질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와장창 무너져 양고기 케밥과 움베르토 에코의 책들을 짊어지고 고시원에 앉아서 입사원서나 여러장 쓰고 있게 될 것이다. 문화가 아닌 생존으로 영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현실이다.

/ 김태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