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적' 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상징하는 바는 주로 '공화주의'와 '예술과 낭만', 즉 정치와 예술 두 가지인 것 같다. 실제로 파리에서 오랫동안 체류했던 홍세화 선생의 글에서는 이 두 가지에 대한 일상적인 심상들이 드러나 있고, (주로 전자에 대해) 그의 가장 큰 관심사인 교육문제를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장 폴 뒤부아(Jean-Paul Dubois)의 <프랑스적인 삶(Une vie francaise)> 에서는 한 프랑스 인 개인의 여정을 그동안 취임했던 대통령의 역사와 함께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 프랑스인들 역시 좌우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쌓아온 정치적 발전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 자부심의 일면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사건은 2002년도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났다. 자크 시라크는 그 선거로 재선에 성공했는데, 그 당시 1차투표에서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펭이 높은 지지율을 얻는 바람에 결선투표에서 좌우의 대결이 아닌 우와 극우의 대결이 이루어졌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투표로 극우파를 결선투표에서 처참한 지지율로 떨어뜨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일견 이런 자부심은 옳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1차 투표에서 르펭이 얻었던 지지율을 해석하고 계몽하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을 가리는 용도로 쓰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내게는 큰 의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파리에 체류하던 때는 프랑스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일종의 기로에 놓여있던 시기였다. 2006년 3월부터 체류를 시작하였는데, 2006년 12월부터 2월초까지는 파리 근교(Banlieu) 지방 이민 2세 젊은이들의 폭동(?)이 있었던 상황이었고, 내가 체류를 시작할 무렵에는 드 빌팽 총리의 CPE(Contrat Premiere Embauche)법안 때문에 한동안 격렬하거나 대규모인 시위들이 많았다. CPE는 CDD(계약직)와 CDI(종신직)형태의 고용체계에 새로운 고용체계를 만드는 것으로 첫 고용시 2년간 자유로운 해고를 할 수 있도록 하여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구하는 고용체계이다. 그렇기에 많은 고교, 대학생들이 반대하였고, 노동조합도 그에 부응하여 함께 시위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또한 여름께에는 현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의 선택적 이민법안이 통과되었다. 그 후 2007년 5월에는 프랑스 역사의 새로운 분기를 설정하는 대통령선거와 국민의회 선거가 있었다. 그래서 유력 일간지들의 1면의 아이템은 정말 마를날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한미FTA가 체결되고 이번에 이명박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면서 이후 국가적 거시경제의 방향을 신자유주의적 변화로 확실히 설정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나마 구색을 갖추고 있던 건강보험과 같은 사회안전망과 공기업형태로 유지되던 거대 인프라 산업은 확실히 위협을 받을 상황에 처해있다. 그런 형태의 일종의 '방향설정'에 있어서 프랑스에게는 지난 2006년, 2007년이 그 중요한 시기에 해당했던 것 같다.

방리외의 이민자 폭동 사태와 선택적 이민법의 발효는 '조건부 평등' 이라는 방향 설정을 보여준다. 실제 프랑스 내 여론 상 이민자들에 대한 시각이 그리 고운 편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프랑스가 최고' 라는 거만한 공화주의의 전통이 있고, 거기에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형성한 슬럼지대와 문화적 분리가 더해져 원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내가 사는 집에 내가 동의해서 노숙자 한 사람을 들이고 같이 공존하려 했는데, '다른 문화'에서 비롯된 이런 저런 행동들에 대해 순간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반응하는 것과 같다. (옷 정리를 잘 안한다든가 하는 것) 또한 '작은 정부'와 '유연한 노동' 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방향 설정에 많은 국민들이 동의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선거전 때 보여주었던 사르코지와 루아얄의 지지율 차이는 최종 결과에서 더 벌어진 상태로 드러났다. 당선 이후 사르코지는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불편하던 미국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실익'을 챙기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에는 기간산업 노동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공공부문의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이런 유권자들의 행태는 여러 방향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이념대결 구도가 무너지고 '실용주의'에 입각한 투표였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하고 그런 조류를 한국의 경우에도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것은 과연 프랑스에서 좌우이념대결이란 것이 실재 했는가의 문제이다. 프랑스의 좌파가 자랑하는 68혁명은 일부 민중의 지지를 얻긴 했지만 애초에 대학생이라는 엘리트 집단의 운동이었고, 그것으로 얻어낸 바가 그렇게 명확하지도 않다. <88만원 세대>에서 우석훈이 지적하듯 대학 평준화는 오히려 고등학생들이 이루어낸 성과였다. 또 68세대가 얻은 경제 구조에서의 성과는 과연 무엇이었나를 생각해보면 딱히 한마디로 정리하여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들이 이루어낸 사회문화적 변화는 주목할 만하지만 그것이 당근을 앞에 보여주고 절벽으로 꼬드기는 자본의 힘에 맞설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즉 정치경제적 변화를 위해서는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 프랑스 대선은 갑자기 변화한 국제질서에 프랑스인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당근처럼 보이는 미끼를 풀어놓았느냐의 문제가 된다. 선거전 기간 동안 UCC를 통해 사르코지에 대한 영상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아주 비장한 음악과 함께 편집된 그 영상에서는 사르코지의 내무장관 취임이후 늘어난 경찰 폭력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그가 미국과 완전히 동기화 된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경고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 점에서 사회당은 이미 실패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루아얄(대선후보)과 올랭드(당수)커플은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그에 반해 사르코지는 국민의 위기감과 공포를 잘 파고들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한국의 이번 대선에서 보여주었던 정책 실종 선거만큼은 아니었지만, 좌파의 네거티브 공세는 오히려 사르코지에게 있어서 느긋하게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자신의 비전만을 제시하는 형태로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지금껏 프랑스라고 딱히 선진적인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식의 얘기를 하긴 했지만, 한 가지 뚜렷한 차이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곳엔 여기만큼의 정치혐오는 없다는 사실이다. 사르코지가 당선될 때 대선 투표율은 80%에 육박했다. (따로 휴일을 지정하는 게 아니라 일요일에 투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이번 대선의 낮은 투표율을 유권자들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합리적 토론이 아닌 힘과 이미지로 밀어붙여 자신들의 뜻을 관철해왔던 권력자들에 대한 당연한 반발심리라고 보는 편이 더 옳다. ‘정치혐오’와 ‘힘과 이미지 정치’의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쓰레기통 뒤지기와 같았던 이번 대선은 이제 지나가고 새로운 무서운 인물이 또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패배에 대해 좌절감도 들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지치지 않고 또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싸워나갈 우리 인간 정신에 자그마한 기대를 걸어본다

/ 김태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