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작성자 :
조항현
Date : 2003-12-04 01:59 | Hit : 2,018
|
"청년환경"은 청년환경센터(http://www.eco-center.org )의 월간 소식지 이름입니다. 저는 소식지 중에서 '과학기술과 환경' 꼭지를 담당하고 있(었)는데요,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 이런 얘기도 조금 하다가 제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와 관련지어 사회현상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관련 글들을 몇번 실은 적이 있습니다. 아래 글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한꺼번에 다 올리면 재미 없으니까 1주일 간격으로 글 몇 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
청년환경 2003년 5월호 원고
모래쌓기 모형과 사회현상에의 적용
나는 물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좁은 세상 연결망 위에서 모래쌓기'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처음에는 생태물리학에 관심이 있었는데 관련된 논문을 읽다보니 조금 다른 분야로 논문 주제를 정했다. 모래쌓기 모형은 자연계에 많이 나타나는 잡음들 중에서도 1/f 잡음을 설명하기 위해 1987년에 제시된 가장 간단한 모형이다. 이 연구를 통해 스스로 짜여진 고비성(또는 자기조직화 임계성; self-organized criticality, 줄여서 SOC)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좁은 세상 연결망은 작년에 한국어로 번역된 A. L. 바라바시의 '링크(동아시아, 2002)'라는 책에도 소개된 것처럼 사회경제 시스템을 모형화하는 중요한 도구로 제시된 연결망 중의 하나다. SOC는 물리학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다른 자연과학·사회과학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 연결망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SOC와 연결망 연구를 연관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며 나의 연구도 그 중의 하나였다.
모래쌓기 모형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규칙만으로도 복잡하고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0) 적당히 원뿔 모양의 모래더미가 있다고 하자.
(1) 모래더미에 모래알을 하나 떨어뜨린다.
(2) 모래알이 떨어진 곳에서 모래더미의 기울기가 어떤 문턱값을 넘으면 바로 옆 칸으로 굴러 내린다.
(3) 그 옆 칸으로 굴러온 모래알에 의해 그곳의 기울기가 다시 문턱값을 넘으면 또 옆 칸으로 굴러 내린다.
(4) 모래알이 굴러 내리다가 더이상 움직이지 않으면 다시 모래더미에 모래알을 하나 떨어뜨린다.
컵이나 그릇에 모래를 담아 평평하게 한 다음 컵이나 그릇을 기울이면 어느 특정한 기울기 이상이 되어야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특정한 값을 기울기의 문턱값이라고 부른다. 이 규칙들에 의해 모래더미가 무너지는 것을 사태(avalanche)라고 부른다. 모래더미가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위의 규칙처럼 모래알 하나를 떨어뜨리고 그것이 굴러 내려가면서 주변의 모래알들에게 영향을 준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두어 번 굴러 내리다 끝나지만, 아주 가끔은 엄청난 크기의 모래사태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엄청난 크기의 모래사태는 이미 그만큼의 잠재된 능력이 모래알 하나에 의해 연쇄반응을 일으켜 폭발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실제로는 한 알의 모래가 어떤 크기의 사태를 일으킬지를 예측할 수 없다.
이제 이 모형을 사회현상에 적용시켜보자.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모래쌓기 모형도 굉장히 추상적이고 단순한 것이며 이것을 사회현상에 적용하는 경우에도 그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냥 이런 설명도 가능하구나 정도로만 보면 될 것이다. 규칙이 조금 달라진다.
(0) 각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것을 참는데는 한계가 있으며 이 한계가 바로 인내의 문턱값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점들과 그 점들을 잇는 선들의 연결망(네트웍)으로 모형화할 수 있다.
(1)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는다.
(2) 어떤 사람이 인내의 한계를 넘는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주변 사람들(이웃들)에게 화를 내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주변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3) 화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은 이웃들 중에 그 스트레스로 인해 인내의 한계가 넘은 사람 역시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4) 더이상 화를 내는 사람이 없으면 다시 사람들에게 조금씩 스트레스를 가한다.
어떤 사람이 작은 스트레스에 의해 더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내기 시작하여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면 엄청난 크기의 폭발(불만의 표출)이 일어날 수도 있다. 여기서도 사회적 불만이나 스트레스가 얼마나 잠재되어 있는지가 작은 스트레스로 야기된 사태의 크기에 영향을 줄 것이다.
교통·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불만의 폭발이 연쇄반응을 일으켜도 그 영향이 멀리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비행기, 인터넷, 핸드폰 등 더욱 빠른 교통·통신기술에 의해 연쇄반응은 더욱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넓어졌다고 해서 사태의 크기가 그대로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연결망을 이루는 점들(사회 시스템의 경우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도 중요한 요소이다. 내가 영향을 준 친구들이 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다시 나에게 영향을 줄 때에만이 사태의 크기가 커질 수 있다. 최근에는 양방향 소통이 가능하며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인터넷으로 인해 우리는 이전 시기와는 사뭇 다른 현상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을 좋게만 보자는 것은 아니다. 더 빠르고 더 멀리 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며, 여전히 인터넷을 이용하기 힘든 사람들이 많고, 컴퓨터 등의 전자제품을 생산하면서 배출되는 환경오염물질을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이 글을 쓸 생각을 하면서 이런 글을 써도 될까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글이 짧아서 많은 얘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더 궁금한 점이 있거나 대화를 원하는 분들은 kyauou2@kaist.ac.kr 로 연락해주시기 바란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