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제도적 분업은 깨지고 있다. 대학 교수들은 자신의 연구활동을 생존을 위한 수익을 창출해주는 사업과 비슷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미 대학이 취업과 고시를 위한 학원으로 바뀌는 현상은 오래 전부터이지만, 최근에는 대학연구도 산업경쟁력에 직접 기여해야 한다고 정부와 산업계에서 점점 크게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연구의 고객은 기업과 정부 그리고 학계 자체일 뿐이다. 일반시민이나 지역사회는 세금 부담을 통해 대학연구를 지원하면서도 그 혜택에서는 소외돼 있다. 따라서 대학연구의 지향도 환경이나 사회복지·노동과 같은 지역사회의 절실한 현실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는 실정이다. 네덜란드의 대학에서 는 바로 이런 문제를 일찌감치 고민해 왔던 교수와 대학원생들에 의해 ‘과학상점’(science shops)이란 것이 70년대부터 자율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과학상점’이란 지역사회집단·공익단체·지방정부·노동자 등이 제기하는 구체적인 기술·사회적 문제에 대해 대학 교수와 학생들이 연구와 자문을 해 주는 제도로서, 현재 네덜란드에는 모든 주요 도시의 대학들에 이것이 설치돼 현재 50개에 이르고 있다.

각 과학상점에는 시민과 대학연구진으로 구성되는 조정위원회가 있어 신청된 과제들 가운데 연구할 것을 선정하게 되는데, 신청자는 연구비를 스스로 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과 상업적으로 이익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연구결과를 생산적으로 이용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학생과 교수는 그들의 정규활동의 일환으로서 이 일을 수행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시간과 비용을 거의 안 들이고, 대학당국도 기존의 예산과 지방정부의 일부 보조로 그 연구비를 지원하기 때문에 추가 재정부담이 없다. 이 제도를 통해 학생들은 학습에 자극을 받는 동시에 사회문제에도 기여한다는 보람을 얻게 되고, 대학과 지역사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대학연구의 새로운 모델로서 부상한 ‘과학상점’은 지금 독일·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 등 여러 유럽국가로 확산되고 있고, 최근 미국에서도 로 카연구소라는 비영리시민단체가 주도해 이를 모델로 한 전국적인 지역연구센터망을 구축하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그동안 정부와 기업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던 우리나라 대학들도 이제는 자율적으로 이런 제도를 도입해 지역사회 문제 해결과 동시에 교수와 학생의 연구의욕을 고취하는 길을 고려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김환석/국민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