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영상 보급, 과학기술도서 배포, 과학기술문화자료실 운영, 과학축전, 가족과학경연대회, 대중과학강연회, 과학기술자 모교방문, 과학인물 기념사업….’

우리나라의 과학대중화 사업을 맡고 있는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올 한해동안 집행했던 행사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특징은 과학기술에 대한 교육·홍보·계몽 일색이라는 점이다.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 이영희 박사는 “기존의 과학기술 대중화정책은 단순계몽에 치중하느냐 또는 사회적 수용성을 강조하느냐에 상관없이, 일반 대중은 과학기술 전문가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피동체로 설정돼 있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원자력발전소 추가건설 정책에 대한 환경단체들의 저항, 전자주민카드에 대한 반발 등은 이처럼 엘리트주의적·계몽주의적으로 접근한 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최근 과학기술을 사회적 관점에서 접근해 해결책을 모색해보자는 움직임이 국내에서도 일기 시작했다. 지난달 치러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과학상점’을 실현시키겠다는 공약이 제시되기도 했다. 국내 대학 가운데선 처음이다. 과학상점은 대학의 연구역량을 활용해 환경·복지·주거 등 사회 현안의 해결방안을 찾는 제도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지난 11월22일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과학기술모임)을 만들었다. 그동안 소규모 모임으로 흩어져 있던 젊은 연구자, 학생들이 대거 동참했다. 이들이 과학기술에 ‘민주화’란 용어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기존의 과학기술 정책과 대중화운동은 과학기술자의 집단적 목소리를 대변하고 관철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추진 주체도 정부, 기업, 이공계 대학 출신의 과학기술자들이 중심이었다. 우리도 과학기술의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기술의 수혜자이자 피해자인 일반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과학기술정책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책과 대중화운동은 의료·환경·교통 등 정작 사회적으로 더욱 필요한 부분을 소외시켜 왔다. 시민들의 참여가 있을 때라야만 사회적으로 균형있는 과학기술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에도 민주화가 필요하다.” 모임의 대표인 김환석 교수(국민대 과학사회학과)의 설명이다.

이 모임을 탄생시킨 것은 지난 2월말 영국에서 첨단유전공학기술로 탄생한 복제양 돌리였다. 당시 복제양의 탄생을 둘러싸고 세계적으로 일었던 과학기술의 윤리성 논란은 국내에도 파급돼 각 분야에서 논쟁이 붙기 시작했다. 지난 7월 열린 ‘생명공학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단체 토론회’도 그중의 하나였다. 토론회가 끝난 뒤 참석자들 사이에 일회성 행사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나왔고, 이것이 바로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현재 모임의 회원은 80여명이다. 아직까지는 이공계 교수·연구원·학생들이 대다수이지만 인문계 출신의 교수, 직장인, 사업가 등도 여럿 참여하고 있다.

과학기술모임은 오는 20일 ‘과학기술 민주화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첫 월례토론회를 갖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이번 겨울 기간중 시민강좌를 개설하고, 미국 로카연구소장인 리처드 스클로브 박사의 저서 〈민주주의와 기술〉을 집단번역해 출판할 계획도 갖고 있다.

간사인 송영민씨는 “시민들이 모임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민운동단체인 참여연대의 내부조직으로 출범한 만큼 앞으로 다양한 시민계층의 참여를 기대한다”고 말했다.<곽노필 기자>

◎시리즈를 마치며/과학기술 민주화 활발한 시민참여 국제적 연대 필수

지난 10월 유럽의 과학기술 민주화 현장에 대한 〈한겨레〉의 취재에 동행하면서 문헌과 인터넷을 통해서만 알던 내용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데 크게 고무되었다. 때마침 과학기술 민주화모임을 준비하던 시기였기에 시의도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취재후 약 2개월이 흐른 지금 국내의 상황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대를 맞아 사회 전체가 충격속에 빠져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경제 살리기가 제일 중요하지, 과학기술 민주화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그러나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만일 시민참여를 통한 민주화가 일찌감치 이뤄져 국가정책이나 기업경영이 투명해지고 의사결정이 소수의 독단에 흐르지 않았다면 이런 사태가 일어났겠느냐고.

유럽 취재에서 받은 인상은 모든 나라가 예외없이 세계화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면서도, 그에 대응하는 방식, 그 속에서 과학기술 민주화를 추구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라는 점이었다. 세계화와 기술발전은 각국의 고용·환경·지역발전 등에 큰 변화를 초래하고 있었다. 나라 규모가 작고 공동체 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덴마크에서는 이를 ‘합의회의’라는 시민참여 제도로 헤쳐나가고 있었다. 과학기술정책에 시민의 의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의회·언론이 이를 뒷받침하는 구실을 했다. 지방자치가 발달하고 대학이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노릇을 하는 네덜란드에서는 ‘과학상점’을 통해 대학과 시민이 결합하고 있었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강력한 스웨덴과 독일에서는 공동결정법 등의 틀 안에서 노조가 주도하는 ‘참여설계’와 ‘기술의 인간화’가 추구되고 있었다. 반면 노조는 강력하지만 사회적 합의의 전통이 약한 프랑스에서는 시민참여를 통한 과학기술 민주화는 보기 어려웠다. 대신 국가기구의 틀 안에서 과학자조직이 결성되고 이 조직 내부에서 민주적 대의제가 확립돼 있었다. 유럽 전체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민주적 통제를 위해 유럽의회 산하에 기술영향평가기구를 두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기구가 ‘합의회의’와 ‘시나리오 워크숍’ 등 가장 앞선 시민참여 제도를 유럽에 확산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마지막으로 스클로브 박사를 통해 미국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미국에서는 아직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민주화는 유럽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고 지적했다. 다만 과학기술운동 시민단체들의 활약에 힘입어 민간과 지역 차원의 움직임만이 활발한 편이라고 한다. 그는 과학기술 민주화가 성공하려면, 시민참여가 연구자·노동조합·시민단체들과 연결돼야 하고 이것이 의회·언론의 지원을 받아 정치적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국제적 연대도 필수적이라고 역설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한국에서 과학기술 민주화운동이 출범한다는데 기대를 나타냈고 앞으로 긴밀한 연대를 이뤄나가자고 당부했다.<김환석/국민대 과학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