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네덜란드 라이덴대학 당국은 재정난을 이유로 학교 안에 있는 ‘과학상점’(science shop)을 폐쇄하려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지역 주민과 환경운동단체 등 사회단체들이 의회와 정치인, 대학당국 등에 진정서를 내는 등 이 방침에 벌떼처럼 반대하고 나섰다. 대학교 안의 ‘가게’ 하나 없애겠다는데 웬 반대 소동일까?

“과학상점은 대학과 사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구실을 한다. 이곳을 통해 시민과 사회단체는 대학이 지닌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정부와 대기업 등 돈이 있는 집단이 대학의 지식을 독점하려드는 상황에서 이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성과이다. 우리처럼 돈이 없는 환경단체는 과학상점의 도움을 받아 재정적 부담없이 과학적 주장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이는 환경정책 결정에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 과학상점의 존재는 납세자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자연과 환경재단 관계자)

“과학상점이 문을 닫으면 이와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단체들이 전문가적 식견을 접할 기회를 상실하게 되고, 그러면 사회적 약자들은 침묵하게 될 것이다.”(헤이그 주민지원재단 관계자)

많은 주민과 사회단체들의 항의의 요점은 과학상점이 없어지면 돈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지역사회 현안에 대한 전문적 연구 성과를 토대로 사회적 논쟁에 참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과학상점은 돈을 받고 물건을 파는 가게가 아니다. 대신 지역사회 문제에 대한 정보나 조언, 연구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리목적의 상점이 아니라 사회적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대학 안에 설치한 비영리 연구기관인 셈이다.

현재 네덜란드에는 모두 13개 대학에 35개의 과학상점이 개설돼 활동하고 있다. 과학상점은 어떤 활동을 벌여왔을까. 위트레흐트대학 화학분야 과학상점의 실무책임자(코디네이터) 마리안 블롬(33)은 한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지난 94년 초 쥘리엔 지역 주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몇년째 동네 집집마다 가솔린 냄새가 심하게 나서 생활에 불편이 크다’는 거였다.” 이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 자원봉사자와 석박사 과정의 스탭이 팀을 이뤄 문제 해결에 나섰다. 토양과 이 지역의 공간 구조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진행됐다. 원인은 그 동네에 있는 한 오래된 주유소의 지하탱크에서 가솔린이 새나와 낡은 하수관을 타고 각 가정으로 냄새가 흘러든 것으로 밝혀졌다. 화학상점은 악취의 원인인 땅에 스민 가솔린을 제거하는 새로운 공법을 제안했다. 화학상점은 또 지역주민과 함께 지방정부가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했고, 내년을 목표로 토질 개선작업이 지난해 시작됐다. 화학상점은 꼭 두해가 걸린 이 연구의 대가로 지역주민에게서 한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과학상점에서 자원활동을 벌인 학생들은 활동 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해 정식 학점을 받을 수 있다. 활동이 6개월 이상 계속될 경우 학생들은 보고서를 작성해 대학 졸업논문이나 석사 학위논문용으로 제출해 심사를 받을 때도 많다. 연구에 필요한 재원이나 장비, 코디네이터 임금 등은 대학당국에서 지원한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의뢰자한테서 연구비를 따로 받지는 않는다.” 에라스무스대학 과학상점 코디네이터 렌 케멜링(46)의 말이다. 이렇듯 네덜란드의 과학상점은 대학의 공식 기구로서 정식 학점을 받을 수 있는 교과과정으로 정착했다.

과학상점의 활동 영역은 화학·물리학·의약학 등 자연과학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과학·법학 등 인문사회과학쪽 분야에서도 과학상점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사회의 각 세력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 발전한다’는 네덜란드 사회의 포괄적 과학기술관에 따른 것이다.

네덜란드 13개 대학의 과학상점은 한해에 대략 2000여 건의 연구의뢰를 받아 처리한다. 환경, 공중보건, 사회복지, 노동조건, 주거, 소비자문제, 문화와 역사 등 그 영역이 다양하고 여러 분야에 걸친 과제도 있다.

과학상점은 연구 과제 선정에 까다로운 기준을 두고 있다. “우선 연구를 의뢰하는 조직이나 단체의 목적이 비영리여야 하고, 스스로 그 연구를 수행할 돈이나 능력이 없어야 한다. 또 환경이나 사람에게 해로운 것을 개발하려 해서는 안되고, 특히 사회적 약자의 지위를 높이는 데 보탬이 돼야 한다. 개인의 의뢰도 마찬가지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로닝겐대학 화학상점 코디네이터 헹크 뮐데르(33) 박사의 말이다. 지난해 과학상점에 문제 해결을 의뢰한 곳은 환경·여성·소비자단체 등 다양한 비영리조직이 절반을 넘었고, 노조나 지역주민 등이 뒤를 이었다. 때로는 지방정부도 과학상점의 의뢰인 목록에 오른다. 그러나 돈많은 기업체나 단체들은 고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네덜란드 최초의 과학상점은 지난 73년 위트레흐트대학에 생긴 화학상점이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무자비한 화학전을 전개하는 데 문제의식을 느낀 일부 화학과 학생과 연구자들이 ‘인간과 사회를 위한 화학’을 기치로 내걸고 과학상점을 시작했다. 물건을 팔지도 않는데 상점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힘없는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친근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과학상점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갖게 된 데는 이런 탄생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암스테르담·위트레흐트·헤이그·로테르담/이제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