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사상의 나라 프랑스는 콩코드와 테제베가 상징하듯 유럽 최첨단 과학기술국이기도 하다. 인터넷이나 컴퓨터 보급도가 낮다고 해서 프랑스를 과학기술이 뒤처지는 나라로 생각한다면 완전한 착각이다. 인터넷 이전에 이미 정보단말기 미니텔을 개발해 보급했고, 현재 세계 최고의 철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또 프랑스는 아리안 로켓의 성공이 보여주듯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 버금가는 인공위성 발사기술을 지닌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의 민주적 성숙도에 비한다면, 과학기술 정책에서의 참여민주주의는 이에 훨씬 못미치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우주·원자력 등 고도로 중앙집중적이고 폐쇄적인 거대기술을 발전시키다보니 시민참여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인구가 6000만여명에 이르는 것도 인구 500만여명의 덴마크처럼 과학기술정책에서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러한 과학 민주주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나름의 잘 짜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엄정한 과학 평가제와 과학자 사회 안의 민주화, 과학자와 시민간 대화의 장 따위가 과학기술민주주의의 ‘프랑스적 대안’이다.

첨단 항공우주산업이나 군수산업을 예외로 한다면 프랑스 과학기술 연구의 대부분은 국립과학연구센터(CNRS)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지난 1939년 창설된 국립과학연구센터는 대학 연구소와 각종 연구실을 망라하는 방대한 전국적 과학연구조직으로, 딸린 연구소가 350여 곳에 이른다. 그외에도 1000여 곳의 연구소와 협력해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한해 예산이 2조원에 이를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국립과학연구센터는 물리학과 수학·핵물리학·엔지니어링·화학공학·우주공학·생명공학·인간과 사회과학 등 7개 분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이 당당히 한 분과를 차지하고 있는 게 시선을 잡는다.

그러나 이런 조직체계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국립과학연구센터 안에 독립적인 기구로서 마련된 국립과학연구위원회(이하 위원회)라는 과학연구평가기구이다. 과학적 연구의 엄정성과 과학의 사회적 복무도는 바로 이 평가에 의해 보장되기 때문이다.

위원회의 직선제 선출 규정은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 위원회는 총 40개 분과로 짜여있다. 한 분과는 각 21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7명은 국립과학연구센터 총장의 추천으로 정부가 임명하지만 나머지 14명은 전국 과학자들이 직선으로 뽑는다.

선거에 참여하는 과학자만도 8만여 명에 이른다. 이 위원회가 ‘과학자의 의회’로 불리는 것도 이렇듯 광범한 과학자들이 직선을 통해 참여하기 때문이다. 지방과 파리간의 연구지원의 형평성을 고려해 위원회 의석도 지방 57%, 파리 43%로 나눠 놓았다. 이렇게 구성된 위원회는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모든 과학연구의 질을 평가하고 각 연구가 프랑스 사회에 얼마나 유용한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을 맡는다.

‘인간에 복무하는 과학’이라는 국립과학연구센터의 모토는 이러한 연구 및 평가체계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국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들 또한 이 위원회의 평가 대상이 된다. 우수한 논문을 내놓은 박사를 뽑아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연구원으로 특채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채용되는 숫자만도 전체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원의 9%에 이른다.

한편 이 위원회는 이러한 연구평가 임무 말고도 4년마다 과학정세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한다. 이 보고서는 이름 그대로 현대과학의 동향과 과제 등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담고 있다. 민주주의는 각종 단위조직의 민주화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프랑스인들의 사고는 과학자 집단 안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파리/이제훈 기자·최연구 한겨레21 통신원>

◎국립과학연구위 슈바이고페르/인간복제 실험 금지 등 과학과 윤리문제 깊이 성찰

“과학자들의 연구의 자유를 제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연구와 적용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다. 프랑스 정부와 국립과학연구센터 산하에 각각 과학윤리위원회를 두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윤리위원회는 예컨대 인간복제 실험 금지 등 과학과 윤리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다.” 파리 16구에 있는 국립과학연구센터에 딸린 국립과학연구위원회의 마리 가브리엘 슈바이고페르 사무총장은 과학기술연구와 정책 적용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며, 과학연구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민주적이면서도 철저한 연구평가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과학연구평가의 척도나 원칙은 무엇인가.
각 분과별로 다르다. 그러나 공통적인 기본 척도는 있다. △연구결과를 영향력 있는 잡지에 발표해야 하고 △국제회의나 토론회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며 △국제적인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덴마크의 합의회의나 네덜란드의 과학상점 같이 대중이 과학정책이나 토론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프랑스에도 있나.
없다. 그러나 과학자와 젊은이가 만나 토론하는 참여 프로그램은 있다. ‘과학과 시민’이라는 이 프로그램은 올해로 7년째 맞는 연례행사인데 18∼25살 사이의 젊은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과학자가 청년 대중들과 열띤 토론을 펼친다. 교육부, 고등교육 및 연구부, 지방자치단체 등의 지원을 받는다. 올해는 지난 10월 24∼26일 사흘동안 프와티에 과학관에서 열렸다. 그러나 민감한 과학정책 같은 것은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 등에서 조직하는 각종 토론회와 공청회가 워낙 많아 따로 논쟁을 유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프랑스는 인터넷 등 정보통신분야에서 다소 뒤처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대책은 있나.
대중적인 분야에서 인터넷 사용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연구소나 기업 차원에서 정보통신분야는 오히려 앞서가고 있다. 첨단정보 분야에서 프랑스의 기술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 일반인들의 컴퓨터 사용이 적은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의회 산하의 과학정책평가기구인 ‘OPECST’와는 관계가 있나.
공식적으로는 없다. OPECST는 의회에서 정책을 선택,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구로 철저히 의회에 복무한다. 과학연구 및 평가를 전담하는 우리 국립과학연구센터와는 별개의 기관이다.<파리/최연구 한겨레21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