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취재진은 코펜하겐에 있는 덴마크 기술위원회에서 세계 과학기술 민주화운동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미국 로카연구소 리처드 스클로브 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스클로브 박사는 60년대에 베트남 반전운동 등을 목도하면서 물리학자의 꿈을 버리고 과학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운동에 투신해, 오늘날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취재진과 동행한 김환석 교수(국민대 과학사회학과)가 그로부터 과학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배경과 그 의미 등을 들어봤다.<편집자>

김환석=우선 과학기술의 민주화에 관심을 두게 된 개인적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스클로브=저는 1953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꿈은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60년대 미국을 휩쓴 민권운동, 환경운동, 베트남 반전운동을 지켜보면서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이 환경파괴와 인명살상을 초래하는 기술개발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의 사회적 구실에 대한 정치의식이 싹텄고, 그냥 단순히 과학자가 되기보다는 과학기술의 사회적인 측면을 공부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김=대학에서는 어떤 공부를 했습니까.

스=학부는 매사추세츠주 암허스트에 있는 조그만 실험대학을 다녔습니다. 학점과 학과가 없이 학생 스스로 관심있는 프로젝트를 교수의 지도 아래 수행하는 곳으로서 저는 핵폐기물 처리 문제에 관해 졸업논문을 썼습니다. 당시 미국은 1천개가 넘는 핵발전소를 건설하려는 야심찬 핵산업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것이 저에게는 위험하게 여겨졌거든요. 75년에 더 공부하기 위해 매사추세츠공대(MIT) 대학원의 핵공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사실 저는 반핵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갔고 논문은 핵논쟁에 관한 사회학적 조사연구가 주제였는데, 학과 교수들은 그 내용을 문제삼았지만 정치학 교수들이 옹호해서 겨우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포드재단의 환경정책프로젝트에 고용돼 2년 동안 수많은 고위 핵전문가들과 정책결정가들을 직접 대하면서 좋은 현실 경험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MIT 박사과정에 들어가 정치학 학위를 마쳤습니다. MIT는 미국 주류 과학연구의 산실로서 저에게는 말하자면 “호랑이굴에 들어가” 그 내부를 보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기회를 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박사학위를 마치면 대학교에 자리를 얻든지 하는데, 왜 그런 길을 마다하고 로카연구소같은 과학기술운동단체를 만들었나요.

스=박사과정을 마친 후 버클리대에서 박사후 연수과정까지 했는데, 이미 저의 평판이 꽤 알려져 아무데서도 저같은 비판적 연구자를 고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밖에서 보듯이 그렇게 민주주의사회는 아니란 증거지요. 그래서 내친 김에 그냥 혼자서 내가 추구하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들자 해서 시작한 게 지금의 로카연구소입니다. 크게 두가지 목적을 지향했는데, 하나는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뒷받침하는 이론적·실천적 활동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학계의 과학기술학(STS)과 현실의 과학기술정치 사이에 다리 노릇을 한다는 것이지요.

김=로카연구소는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요.

스=저를 포함해 4∼5명의 아주 적은 인원이 일하고 있습니다. 예산은 지난해 15만달러 정도였는데 그 반은 민간재단의 지원비, 나머지는 개인들의 기부금과 대학에서 받는 공동사업비였습니다. 아직 재원을 확보하지 못해 항상 어려움을 겪는 편이지만, 쓰는 예산에 비해 그 영향력은 전세계에 걸쳐 매우 크다는 것에 자부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저희 활동을 알리고 사업을 수행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는데 적은 비용으로도 큰 효과를 보고 있지요.

김=주로 과학상점같은 지역사회 봉사연구, 합의회의같은 시민참여적 기술영향평가, 참여설계 등 민주적 기술개발방식의 확산에 힘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민사회가 발전되어 있지 않은 한국에서도 이런 제도들이 가능할까요.

스=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라 여건에 따라 개량은 필요하겠지요. 과학상점은 대학당국의 태도만 적대적이 아니라면 열의 있는 소수의 학생과 교수만 있어도 당장 시작할 수 있고, 합의회의 역시 정부와 독립적으로 민간 차원에서 그리고 지역사회 수준에서도 개최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노동운동이 강하니까 작업장 안전문제 등에 노동자참여설계를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김=끝으로 이런 제도를 적용할 때 유의할 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스=시민사회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토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디어를 통해 과학기술의 사회적 논쟁을 확산시키고, 공익기관과 시민단체들을 연결하여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더욱 공고한 정치적 기반으로 형성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로카연구소 어떤 곳인가/www.amherst.edu/~loka/menu.html/과학기술 비민주성 매서운 비판/지역사회연구망 설립… 환경문제 등 시민들 적극활동

지난 87년 창립된 로카연구소는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비영리 연구소이자 시민운동단체이다. 과학기술에 관한 의사결정에 공익단체, 보통시민 및 노동자가 참여하는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사회적·환경적으로 더 책임있는 과학기술이 발전하도록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로카연구소는 창립 이래 꾸준히 대언론 홍보활동, 단행본과 연구보고서 출간, 학회 및 공청회 공동개최 등을 통해 과학기술 시스템의 비민주성을 매섭게 비판해 왔다. 이러한 활동으로 이제는 의회나 정부쪽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떠올랐다. 국립과학재단, 의회 과학기술 관련 상임위나 백악관 등에서 개최하는 공청회에 로카연구소가 자주 초청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연구소가 비판에만 주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대안적 과학기술 시스템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활동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우선 ‘지역사회연구망’ 설립 노력을 들 수 있다. 이는 각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산업안전보건 문제, 환경오염 문제, 장애자를 위한 기술개발 등 지역사회의 주요 사회적 현안에 대한 연구·개발 및 시험·평가를 담당하도록 하자는 것으로, 연구개발의 목표와 우선 순위의 설정에서부터 연구개발의 실행 단계에까지 다양한 시민집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참여 연구·개발·설계의 확산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 현재 이 프로젝트에는 로카연구소 외에 200여 지역활동가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학, 연구기관 관계자들이 참여하여 네트워크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시민주도 기술영향평가’는 로카연구소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또 하나의 분야다. 다수의 선진국들은 대규모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진행이나 기술 시스템의 도입에 앞서 그 사회·정치·환경적 영향을 검토하는 ‘기술영향평가’ 제도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시민 참여가 폭넓게 허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로카연구소는 기술영향평가 과정에는 전문지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수많은 사회적 선택과 가치 판단이 개입되며 따라서 대중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밖에도 로카연구소는 ‘과학기술활동가연맹네트워크’(FASTnet)를 설립하여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관계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개인들과 단체들 사이에서 정보와 조직의 중추 노릇을 맡아오고 있으며, 사회적 책임을 위한 컴퓨터 전문가 모임(CPSR), 21세기 프로젝트, 이웃기술센터(CNT) 등의 단체들과 연대하여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김환석/국민대 과학사회학과 교수>